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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영화

12.12 군사반란 영화 '서울의 봄'

요즘 개봉한 서울의 봄 인기가 많은데요. 12.12 군사반란 사건을 요약해서 적어봅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가 어떻게 우리나라 권력을 쥐게 되었는지, 사건이 터지기 전과 후에 과정을 다뤄보았습니다. 

 

 

서울의봄/전두광/이태신
영화/서울의봄/줄거리

 

12.12 군사반란 사건 전

먼저 그전에 사건을 알아봐야 한다. 10월 26일 김재규의 대통령 암살로 나라가 떠들썩하게 되었는데 김재규가 나라에 1인자,2인자인 박정희, 차지철을 암살하자, 그다음 권력자인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높은 권력을 쥐게 된다. 대통령이 없자 급하게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이 되었고 암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합수부'가 꾸려졌는데 그 합수부의 지위를 전두환이 맡게 되었다. 전두환은 대한민국 국군을 장악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고, 그가 이끄는 하나회를 중심으로 군대를 장악하고 싶어 하였다.

 

※하나회란??

전두환이 이끌었던 대한민국 육군 내 비밀 사조직

 

그러자 육군참모총장이였던 정승화가 전두환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정승화는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직에서 경질시키기 위해서 그 당시 국방부장관과 비밀리에 얘기를 나눴다. 하지만 비밀리에 있었던 하나회에 회원들이 이를 알고 전두환 귀로 전달하였고 위협을 받은 전두환은 자기보다 상관인 정승화를 체포하여 무력화시키려고 했다. 그가 내세운 체포 명분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대통령 암살 당시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정승화가 김재규와 내통하여 같이 암살 계획을 세웠다 등등의 명분을 내밀었다. 그가 내린 결단은 일단 먼저 정승화를 체포하고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체포를 허가받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실행에 옮긴다.

 

 


12.12 군사반란

정승화 체포

합수부가 육군참모총장의 공관으로 난입하여 대통령 허가가 떨어졌다고 말하고 체포하려고 하였다. (허가는 받지 않은 상태)  정승화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여 국방부장관에게 확인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그때 합수부는 정승화 호위병들에게 총기를 난사했고 정승화를 체포하였다. 

 

같은 시각 전두환은 그 허가를 받기 위해 직접 대통령의 공간으로 간다. 쉽게 허가해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최규하 대통령은 큰 논의라고 생각하여 허가를 거부했고 전두환은 매우 당황하였다. 허가가 없으니 전두환은 명백히 반란군이 되었고 그래서 전두환이 생각한 방법은 무력을 써서 대한민국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의 행위를 덮으려고 하였다.

 

 

전두환은 화나회 즉, 특전사 중심이었던 1 공수여단을 출동시켜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장악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육군지휘부였던 정승화 측으로 인하여 본 대로 회군하였다. 이 출동으로 인해 육군지휘부를 자극하여 육군지휘부는 26사단과 수기사 (수도권 비상사태 시 출동되는 부대) 에게 연락을 하였다. 특히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적극적으로 두 사단을 내보내라고 출동요청을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명령을 안 듣고 출동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합수부가 모든 연락망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미 무전하는 것들을 도청하였고 하나회 인맥을 통해 어떻게든 두 사단이 출동하지 못하도록 막은 거였습니다. 

 

하지만 희망은 있었다. 바로 특전사 중에서도 비하나회인 9공수가 있었고 육군지휘부는 비하나회인 9 공수에게 출동을 명령했다. 그 소식을 들은 합수부들은 좌절했다. 그 이유는 당시 9 공수여단은 가장 서울과 가깝게 있었기 때문이고 9 공수가 먼저 서울에 진입하면 그 즉시 합수부는 바로 끝장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합수부들은 묘안을 하나 짰다. 육군 지휘부 측에 제안을 해서 싸우지 말자고, 이렇게 싸우면 북한 측에서 내려올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합수부는 신사협정을 맺자고 제안하였고 물론 합수부는 맺어져도 지킬생각이 없었다. 맺어지면 반란군으로 처벌받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압군 측은 승낙하였고 9 공수를 회군하라고 지시하였다. 

 

급한불은 일단 끈 상태.... (전두환 입장에서는)

 

 

전두환은 3공수여단에게 연락해 특정사령부를 장악하고 특정사령관이었던 정병주를 체포해 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3 공수는 특정사령부에 난입하여 총기를 난사하였고 그로 인해 정병주는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이에 전두환은 육본, 국방부를 장악하기 위해 1 공수여단에게 다시 출동하라고 명령하였고 1 공수 여단장 박희도가 상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병력을 출동시켰다. 행주대교를 통해 다리를 건너고 육본 및 국방부에서 총격전을 일으켜 병력이 아직 오지 않은 육군지휘 측은 무너지고 결국 1 공수가 육본 및 국방부를 점령하였다. 사라졌던 노재현 국방장관이 국방부에 숨어 있었고  합수부는 즉시 노재현을 연행하였다. 


12.12 결말

합수부는 상황을 확실히 정리하기 위해 전방을 지키는 9사단을 노태우가 빼네 중앙청을 점령하려고 한다. 이는 매우 위험하였다. 왜냐하면 전방을 지키는 9사단이 없으면 북한이 내려올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두환은 서울을 점령시키는 것이 더 먼저라고 생각하였고 장태완은 마지막 공격을 하기 위해서 수경사를 이용해 진입하려고 하지만 대부분 하나회의 가담되어 있어 유일한 행정병 1개 중대밖에 없었다. 그렇게 장태완은 행정병 1개 중대를 끌어모아 마지막 최우 돌격을 하려고 했지만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반란을 막은 모든 부대가 사라져 버리고 국방장관인 노재현이 대통령에게 가서 허가 서명을 받으러 가고 그렇게 9시간 만에 12.12 군사반란이 막을 내렸다.


12.12 이후 

전두환은 정승화 계열에 정성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로써 반대파 숙청을 마무리 하였고 전두환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중심 잡았다. 

 

 

 

 

참 안타깝네요. 우리나라 병사들끼리 서로 싸우고 죽이는게.. 참..  이상 12.12 군사반란 사태에 대해서 다뤄보았습니다.